이탈리아의 명문가 메디치 가문의 혈통이 끊겨버린 이유.soreum

이탈리아 본토 전체를 통일한 통일 왕국은 19세기 초까지도 나오지 않았으며

이탈리아 땅에서 제각기 세력을 키우던 여러 가문 중 프랑스 남부와 맞닿아 있는 사보이(Savoy) 지방에서 시작된 사보이 가문이 마침내

1861년에 사르데냐(Sardegna)의 지도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본토 전체를 통일하게 된다.

이탈리아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사보이 가문은 이탈리아의 여러 유력 가문들 중에서 특히 그 역사가 긴 가문이기도 하다.

사보이 가문은 1003년에 프랑스 사보이 지방의 귀족 움베르토(Umberto)가 사보이 백작 가문을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프랑스 생 장 드 마우리엔느(Saint-Jean de Maurienne)에 있는 움베르토 1세의 무덤

단일 가문이 무려 거의 천 년 동안이나 그 혈통이 끊기지 않고 유지된 것은 그런 가문이 수두룩한 아시아 쪽을 제외하고(일례로 한국의 경주 김씨, 김해 김씨, 안동 권씨 등등, 중국의 공자 후손, 맹자 후손 등등)

나머지 세계 전체를 통틀어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유럽에서는 카페 왕조, 합스부르크 왕조 정도?

그러나 이 사보이 가문이 본격적으로 전 유럽에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때는 프랑스 왕실의 일원과 결혼 동맹을 맺기 시작한 16세기 즈음이다.

이 사보이 가문이 이름을 날리기 전에는 이미 이탈리아에 탄탄한 재력과 드넓은 포용력을 둘 다 가지고 있던 유력 가문이 있었으니,

바로 메디치(Medici) 가문이다.

메디치 가문의 문장. 위의 왕관은 왕에 버금가는 지위를 가진 대공의 왕관을 의미하고, 아래는 메디치 가문의 문장인 여섯 개의 공, 그 중 하나는 프랑스 왕실로부터 하사받은 백합 무늬가 새겨져 있다.

메디치 가문은 이탈리아의 피렌체 지방에서 한 부유한 상인이 은행을 세우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은행이 크게 성공하면서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부를 얻게 되었고

그 부에 힘입어 권력까지 얻어 마침내 이탈리아 내에서 가장 강한 세력의 귀족 가문이 되었다.

메디치 가문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곧 국외로 진출을 시도하는데, 이 과정에서 유럽의 여러 유력 왕족들이 메디치 가문에 관심을 보이면서

메디치 가문의 여러 남녀 일원이 유럽의 왕족들과 결혼을 하게 되고, 이로써 메디치 가문의 세력은 더욱 커지게 된다.

일례로 프랑스 부르봉 왕조를 세운 앙리 4세(Henri IV)와 결혼한 마리아 디 메디치(Maria de Medici, 프랑스어로는 마리 드 메디시스 Marie de Medicis)가 있다.

Henri IV.jpg Marie de Médicis.jpg

왼쪽부터 프랑스 왕 앙리 4세, 프랑스 왕비 마리아 디 메디치.

메디치 가문은 그 후로도 프랑스의 여러 왕족들과 결혼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들의 문장에 프랑스 왕실의 문장인 백합을 넣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메디치 가문이 유럽 각국 왕조들과 막강한 부를 등에 업고 승승장구할 때 쯤, 메디치 가문을 대표하는 토스카나 대공(Grand Duke of Tuscany) 가문의 수장인

코시모 3세(Cosimo III)가 1723년, 노환으로 죽는다.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3세.

코시모 3세에게는 아들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장남이 바로 페르디난도(Ferdinando)이고,

차남은 지오바니 바티스타 가스토네(Giovanni Battista Gastone)이었다.

왼쪽부터 페르디난도와 지오바니 바티스타 가스토네

코시모 3세가 죽을 당시 그의 장남 페르디난도는 아무 걸림돌도 없이 대공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페르디난도의 경우 80세를 넘기고 죽은 아버지보다 일찍 죽었기 때문에 그는 대공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코시모 3세가 죽은 후 차남 지오바니 바티스타 가스토네가 대공이 된다.

페르디난도가 대공 자리를 이을 세자(世子)로 임명될 당시 그의 나이는 10살도 되지 않았으며, 1689년에는 바바리아(Bavaria) 선제후 페르디난트(Ferdinand)의 딸 비올란테 베아트리체(Violante Beatrice)와 결혼했다.

페르디난도가 유력 선제후의 딸과 결혼했으니, 이제 그들 사이에서 아들을 낳아 후에 대공 자리를 잇게 하면 페르디난도의 생전의 임무는 다 끝난 것이다.

그런데 페르디난도는 어릴 때 부터 자유분방한 그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각종 예술, 특히 음악에 크나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공국의 영토 뿐 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수 많은 유능한 음악가들을 불러모았으며, 그들을 고용해 그의 궁정 가수, 연주자로 삼고

메디치 가문의 재력을 바탕으로 매달 월급을 많이 주었다.

그러나 그는 음악에 너무 빠진 나머지, 다른 분야에는 영 무관심이었으며 게다가 그의 부인까지도 멀리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50세의 나이로 자식 없이 죽고 만다.

자,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과연 페르디난도는 달랑 음악 그 하나에 빠져서 다른 것을 다 내버리고 부인하고 성관계도 안 했을까?

물론, 아니다. 페르디난도에게 자식이 없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페르디난도가 바로 똥꼬충이었기 때문이었다.

앞서 페르디난도가 음악을 좋아한다고 설명했는데 그가 그의 궁정으로 불러들인 음악가들 중에는,

여자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거세를 한 남자 가수인 ‘카스트라토(Castrato)’도 있었다.

페르디난도가 한 번은 궁정에서 크게 무도회를 열고 자신이 불러들인 음악가들을 총출동시켰다.

페르디난도가 춤을 추는 와중에, 그의 주변에는 수 많은 예쁜 여인들이 있었지만 그는 그 여인들에 대해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 여인들이 페르디난도에게 같이 춤을 출 것을 요청했으나, 그는 모두 거절하고 춤을 계속 추었다.

한창 춤을 추던 그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의 궁정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어린 카스트라토,

도메니코 체키(Domenico Cecchi)였다.

도메니코는 2차 성징이 오기 전인 어린 시절에 거세한 터라 외모가 여자나 다를 바 없었다.

페르디난도는 하인을 시켜 그 자리에서 당장 도메니코를 데려오게 한 뒤 죽을 때까지 그의 곁에 두고 같이 잠을 잤다고 한다.

이렇듯, 페르디난도는 어린 남자를 사랑한 똥꼬충이었다.

그러나, 페르디난도는 음악이라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에 도메니코를 가까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페르디난도의 상황과는 달리, 그가 죽은 후에 대공이 되는 그의 동생 지오바니 바티스타 가스토네는 아무런 명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개막장짓을 하다 메디치 가문을 끝장내버린 상병신이다.

왜 그런지 아래를 보자.

자식이 없는 페르디난도가 죽자 그의 동생인 지오바니 바티스타 가스토네가 토스카나 대공이 되었다.

지오바니 바티스타 가스토네의 어머니는 마르그리트 루이즈 도를레앙(Marguerite Louise d’Orleans)이며, 그녀의 아버지는 바로 프랑스 왕 루이 13세(Louis XIII)의 동생이자,

초대 오를레앙 공작인 가스통 도를레앙(Gaston d’Orleans)이다.

지오바니 바티스타 가스토네의 이름 중 가스토네는 바로 그의 외할아버지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

지오바니 바티스타 가스토네는 정치에 영 관심이 없던 형과는 달리 재위 초반에는 가난한 백성들에게 세금을 물리지 않거나 공개 처형을 금지하는 등 꽤나 노력을 보이기도 했지만,

전 대공이자 형인 페르디난도가 워낙 정치를 하는 데 똥을 많이 싸지르고 죽었기 때문에 그가 대공이 되었을 당시에는 이미 토스카나 공국의 국력이 쇠퇴 중이었다.

군대의 숫자는 단 몇 천명 밖에 되지 않았으며 국고는 텅텅 비었으며 도성 내에는 거지들로 들끓었다고 한다.

그것도 모잘라 국외의 여러 나라들이 이 메디치 가문이 다스리는 공국을 호시탐탐 먹으려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지오바니 바티스타 가스토네는 끝내 체념하고,

그 또한 그의 형처럼 정치에서 점차 무관심해져갔다.

그가 정치에서 손을 놓으면서 그의 공국은 점차 당시 유럽의 강대국들의 제물로 전락해갔다.

특히 강대국 중에서도 신성 로마 제국의 프란츠 1세와 스페인의 카를로스 3세가 끊임없이 눈독을 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들의 눈치도 계속 보아야 했다.

이러한 불안한 정세가 계속되는 가운데, 마침내 프란츠 1세는 결심을 한다.

토스카나 공국의 메디치 가문이 이미 세력이 극도로 약해진 것을 알고 있던 그는

대공에게 서신을 보내

‘당신은 결혼은 했지만 자식도 없고, 남자 동생 조차 없으니, 우리에게 그 공국을 넘기는 게 어떻겠소? 보상은 충분히 해 드리리다.’

라고 전했다. 이에 지오바니 바티스타 가스토네는 (이미 체념한 터라) 별 감흥이 없었고

그의 나이 이미 70이 가까워졌고 그의 공국 상황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하는 수 없이 신성 로마 제국에 공국을 넘기고 만다.

그 나이 66세가 되던 해에 그는 비만과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난다.

지오바니 바티스타 가스토네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약 300년간 이 토스카나 지방을 다스려 왔던 이 메디치 가문의 유일한 공국인 토스카나 대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로 넘어갔다.

자식이 없다니, 그럼 결혼을 안 했던 것인가? 아니다, 물론 그도 결혼을 했다.

그는 보헤미아 지방의 한 귀족의 딸인 안나 마리아 프란치스카(Anna Maria Franziska)와 결혼했으나, 그녀와의 결혼 생활은 지옥의 연속이었다.

그는 먹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 젊은 시절부터 과식을 하고 게다가 말 타기, 사냥과 같이 외부 활동을 굉장히 싫어했던 게으르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매일같이 술에 쩔어 살아 그는 집무를 볼 때도 취한 상태일 때가 부지 기수였으며, 성격도 괴팍해 아무에게나 욕을 하기 십상이었다.

그는 삼촌뻘인 루이 14세(그의 어머니는 루이 14세의 사촌 여동생이다)처럼 씻는 것을 싫어해 한결같이 몸에서 쉰내가 진동을 했다.

그의 불결함을 보여주는 한 일화로, 한번은 그의 형의 미망인(비올란테 베아트리체)가 연회를 연 적이 있었다.

그는 그 연회에 참석했고 연회에 술이 준비되어 있자 알코올 중독이었던 그는 얼씨구나 하고 술을 물 마시듯이 마셔댔다.

그러나 너무 술을 많이 마신 나머지… 그는 구토가 밀려왔고 순간적으로 옆에 있던 고급 의자에다 구토를 했다.

그런데 드럽게도 구토를 하고 나서 입에 묻은 것을 그의 가발로 닦아내어 주위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렸다고 한다.

몸에서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하여 사람들이 그의 근처에 가는 것을 꺼려했다고 한다. 뭐 물론 그 자신도 밖으로 나오는 것을 싫어했으니까 서로 윈윈.

그는 결국 그와는 정 반대로 말을 타고 사냥을 즐기며 사교적인 성격이었던 그의 부인과 자연히 멀어지게 되었다.

당연히 성관계도 가지지 않았다. 일설에는 그가 심한 발기부전이라고도 전한다. 그 부인의 증언이라고 한다.

그와 멀어지다 못해 그의 부인은 그를 혐오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그녀는 한번은 그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끔찍하고 고도비만이며, 허벅지의 크기를 가늠할 수가 없다.’

그도 그에 맞서서 부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성격, 교활한 외모, 상스러운 말투를 가졌다.’

사실 위 사실만 보아도 지오바니 바티스타 가스토네 쪽이 병신이고 잘못한 것인데 이렇게 정상적인 부인을 까려 드는 것으로 봐도 이미 사람같지가 않다.

그 이후로 둘은 거의 별거 상태로 있었고 부인은 자신의 고향인 보헤미아에 가 있는 경우가 잦게 되었다.

그리고 또 놀라운 사실은, 그가 부인과 성관계를 가지지 않았던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어느 정도 예측이 될 거라 믿는다.

맞다. 그는 그의 형과 마찬가지로 악명 높은 똥꼬충이었다.

그는 도성 밖에서 순방를 하다가 보잘것없는 평민인 줄리아노 다미(Giuliano Dami)를 알게 된 이후,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 없었다고 한다.

줄리아노 다미는 어떤 학교의 학생이었으며, 외모가 여자처럼 예뻤다.

그는 하인들에게 명해 당장 그 소년을 데려오게 하여 그의 측근으로 삼았고, 그는 그의 총애를 받아

누군가가 지오바니 바티스타 가스토네와 말을 하려면 먼저 줄리아노 다미에게 부탁을 해야 할 정도의 권세를 누렸다.

게다가 줄리아노 다미는 그의 성적 노리개로서도 크게 활약(?)했는데,

그 뿐만 아니라 수 많은 소년 소녀들이 그의 침실로 불려와 그에게 서비스(?)를 행했다고 한다.

단 그들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는데 냄새에 무척 둔감하다는 것이다.

그의 몸에서는 항시 쉰내가 났기 때문에 냄새에 민감하다면 도저히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위에서 그가 똥꼬충이라고 말했는데 탑 성향을 가지고 있던 그의 형과는 달리 그는 굉장한 마조히스트였으며 바텀이었다.

그는 예쁜 소년을 불러들인 뒤 그의 바지를 벗겨 그의 성기를 관찰하고 발기하도록 자극했다.

마침내 그 소년의 성기가 발기되면 그는 그더러 자신의 항문에 그것을 삽입하라 지시했다.

행여나 소년의 행동이 미숙하면 그는 ‘빨리 박아, 빨리’라고 그를 재촉했다.

그리고 난 후 그는 그 소년을 껴안고 입을 맞추는 등 더러운 행동에 푹 빠져 살았다.

그는 또 마조히즘의 극치를 보여주었는데 바로 어린 애들을 보고 ‘고귀한 왕자님, 공주님’이라 하며

자신에게 욕을 하고 조롱하도록 지시했다. 지시를 잘 따르지 못할 시에는 무척이나 화를 냈다고 한다.

그는 그런 방탕하고 추잡한 생활을 이어가다 각종 성인병, 심한 요로결석으로 1737년에 죽는다.

그는 죽고 나서 그의 생명도 잃고, 가족도 잃고, 영토도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

결론: 똥꼬충은 필망(必亡)한다.

세줄요약

1. 이탈리아의 명문가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지도자는

2. 고도비만에 쉰내가 나는 악명 높은 똥꼬충이었고

3. 그로 인해 미소년들에 정신이 팔려 나라를 말아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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