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큰손들 – 명동 백할머니

한국의 큰손들중 주식시장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인물들을 심심할때마다 한 명씩 조명해 볼라고해.

첫번째 인물로 명동백할머니를 고른건 광주일고 출신으로 거물이 된 미래에셋 박현주 회장의 스승이기도 하기 때문이지.

일단 명동백할머니의 얼굴부터 한번 보고 이력을 확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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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인터넷에서 구할수 있는 사진인데 일요신문 창간호 특집기사 였다네 

여장부 스타일로 보이는데 키는 150cm 내외로 작은 편이였다고 한다.

본명은 백희엽 인데 별명인 명동백할머니 로 더 유명했지.

평양 대지주의 딸로 태어났는데, 백선엽 장군의 사촌누나라고 하네

백선엽장군이 집안이 어려워 평양사범대학 갔다고 하는데 무슨 대지주냐고 할수도 있지만 원래 백선엽 장군 아버지도 지주집안 출신으로 일본 메이지대학을

나왔었고 백선엽 장군이 7살때 세상을 뜨면서 집안 어려워졌었다고 하니 명동백할머니는 일단 금수저 출신이라고 보자.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박정희 대통령이 남로당 총책으로 의심받으면서 숙청당할 상황에서 미군에 적극적으로 구명을 요청했었고 다시 정보국에 자리를 만들어주기도 했었으니 백선엽 장군이 70년대 들어 기업인으로 지내면서 잘 나간것도 그렇고 집안에서 하던 선인학원이나 명동백할머니등의 경력을 봤을때는 박정희 대통령 집권시절이 실제로 집안의 전성기 시절인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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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학원 이사장이였던 백인엽씨가 백선엽씨의 친동생이지. 

명동백할머니도 1975년 건설주 파동때 증시 큰손으로 떠 오르게 되었는데 그전의 약력을 한번 보자 

6.25전쟁이 터지고  평양에서 부산으로 월남을 했는데 무일푼으로 내려왔지만 부산에서 페니실린과 마이신장사를 해서 종잣돈을 만들었고 

대구에서 군복장사,종이장사를 해서 큰 돈을 모았다고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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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염색으로 큰 돈을 벌었던 큰 손이 증시에 한명 더 있는데, 광화문곰이라고 불리우던 고성일씨도 나중에 다뤄야겠지.

명동백할머니도 군복장사로 큰 돈을 벌었다고 해서 자료를 찾아보니 그 당시에 옷이 부족하다 보니 군복을 검은색이나 회색으로 염색해서 

입는게 대유행이었는데 해외에서 염료를 수입해오면 즉시 20배 가격에 팔수 있었다고 하네.

명동백할머니가 무일푼으로 내려왔지만 이때 이미 상당한 종잣돈을 만들었었고 본격적으로 큰손이 된 계기는

1950년대 후반에 건국채권이 액면가 20%에 거래되는 국채파동때  닥치는데로 사서 큰 부를 만들었다고 해.

그 당시 상황을 잠깐 알고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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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증권거래소가 출범한건 1947년 증권구락부라고 볼수 있지만 실제로는 1956년에 대한증권거래소가 출범하면서라고 보더라.

근데 그당시에는 상장된 주식이 12개사 뿐이였고 대부분의 주식이 정부소유여서 실제 유통되는 물량도 거의 없었다고 해 

그래서 증권거래소에서는 주로 건국국채위주로 거래가 이루어졌었다고 하네.

명동백할머니가 큰돈을 벌게 된 계기가 된 국채파동은 1958년도에 일어난 사건인데 최초의 가격조작사건이라고 볼수 있어 

합법적으로 체결된 거래가 무효화 되는 사태까지 만들어졌었는데 자세한 이야기 까지 하면 너무 길어지고 국회가 11회부터 국채발행을 중단하겠다고 해서

국채가격이 폭등하다가 번복을 해서 11회차 발행이 무수정으로 통과되었고 40환까지 올라갔던 건국국채가 24환까지 폭락을 했었고 매수측에서 38.15환까지 억지로 끌어올렸다가 다시 10환까지 폭락했고 다시 45환까지 폭등하면서 미결제약정이 42억 환이 넘어가게 되고 그당시 증권사들이 이걸 결제할 자금이 없었기때문에 10회차 국채거래를 정부에서 무효화 했던 사건이야.

명동백할머니가 본격적으로 주식거래를 시작했던건 1960년대 말부터라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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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 이유는 1968년에 시작된 “자본시장 육성에 관한 법률” 이 시행되면서 채권에서 주식으로 패러다임이 쉬프트 되는 때에 같이 행동을 한거 같아.

박정희 대통령이 60년대 시작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성장한 산업재와 에너지 기업들 위주로 24개 기업이 60년말까지 상장이 되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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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안이 통과되면서 상장기업숫자가 1971년 50개에서 78년에는 356개로 늘어나게 되고 공모주로 큰 돈을 버는 사람들이 생기던 때지.

틀딱충 형아들 중에 그 당시에 정부에서 50주씩 배정받을수 있게 해준 국민 공모주 같은거 받은 사람들도 있을꺼야.

이때 돈많은 사람들은 아파트 청약 딱지 사듯이 사람들을 사서 명의를 빌려 청약을 해서 큰 돈을 벌었을꺼라고 봐.

이 당시 명동백할머니가 굴렸던 자금이 300억에서 400억 정도라고 하는데 이돈이 얼마나 큰 돈이냐 하면 1970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증시 전체의 시가총액이 979억이였어. -_-

우리 나라 증시가 투기판이였던 시절에 명동백할머니는 정석투자를 고수 했다고 해서 유명한데 실제로 샀던 종목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없는데

큰돈을 번건 역시 70년대 거래소에 건설주 파동이 불었을때라고 하네

70년대 초에는 삼보증권(현 대우증권) 지분을 10%나 가지고 있던 2대주주 였기도 했지만  95년 사망할때 까지 검소한 생활을 유지했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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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셋 박현주 회장이 명동 백할머니의 제자라고 해서 유명한데 박현주 회장의 말로는 그 당시 건설주 파동으로 큰손을 벌었다고 하지만 끝까지 망하지 않고

죽을때까지 큰 손의 지위를 유지한건 우량주를 장기투자하는 원칙을 가지고 투자를 했었기 때문이라고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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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당시 삼보증권 회장을 하엿던 강성진 전증권업협회 회장의 말로는 자기들 단골고객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 백희엽씨라고 하면서

“그녀는 반드시 우량기업에만 투자하고 한번 투자하면 적어도 2~3년은 보유할 정도로 아주 정석 투자자였다” 고 말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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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백할머니가 95년도에 사망했을때 언론에서는 실물자산이 200억 대라고 했는데 실질적으로 남겨진 재산이 얼마인지는 정확히 알수 없어 

다만 장남인 박의송씨가 서울대를 나와 미국에서 MBA를 하고 삼보증권 상무이사를 거쳐서 우풍상호신용금고 회장을 지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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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도에 한화종금을 적대적 M&A할려고 하다가 재산을 많이 탕진했다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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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중에 그 유명한 성도이엔지 공매도 사건으로 2000년에 영업정지가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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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에도 수천억원의 재산을 탕진했다는 기사들이 많이 나온걸로 봐서는 실제로 자식들에게 물려준 재산이 최하 수천억대는 될꺼라고 추정되고

실제로 60년대 말에 저정도 금액을 굴렸다면 더 많을 수도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명동백할머니의 어록으로 알려진 글로 마무리 하자

 “투기는 죽어나는 곳에서 벌이는 자선행위야. 이 말의 뜻을 제대로 해석하면 자네는 투자의 처음과 끝을 아는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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