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놓친 안타까운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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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놓친 인재 “첸쉐썬”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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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론 Qian Xuesen 한자론 錢學森으로 쓰는 이 사람은 중국의 과학자로 중국의 핵개발에 기여하고 중국이 현재 알차게 운용중인 둥펑, 실크웜 미사일을

개발하였으며 중국의 우주계획을 이끌기도한 천재과학자이다. 미국에서 교수로 지내는 등 중공과는 그리 큰 연관이 있어보이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한때 미국에 미친듯이 불어닥치던 맥카시즘의 피해로 결국 중국에 넘어가게된 인물이지.

먼저 간략히 생애를 훑어보자.

그는 1911년 12월 11일 당시 청나라의 항저우에서 태어났는데 이후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으루 이주한다.

대학입학때 치른 수능에서 전국 3위를 할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던 그는 국비장학생에 선출되어 MIT에서 기계공학 석사과정을 밟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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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T에서 석사를 취득한 천쉐썬은 실험중심의 MIT보단 이론과 수학위주이던 칼텍으로 눈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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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졸업당시의 첸쉐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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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칼텍의 지도교수는 전후 미국이 유럽전역에서 모셔오던 이공계 브레인중 한명인 “테오도르 폰 카르만” 박사였는데

카르만 박사는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여러 헝가리 과학자중 한 명 이었다. 다른 과학자들과 더불어 카르만 박사는 미국의 항공공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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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능한 헝가리-유대계 과학자 중 하나였던 카르만 박사)

쨌거나 첸쉐썬은 칼텍에서 로켓동아리에 참여하여 여러 실험을 했는데 후에 이를 눈여겨 본 미정부에서 그를 스카웃해가 해가 현재 NASA소속으로 되어있는

제트추진연구소의 연구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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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칼텍의 로켓동아리. 당시 대학생들로 구성된 이 로켓실험은 꽤 위험해서 죽을 뻔한 고비가 여러번 있었다고 함.)

여담이지만 이 제트추진연구소는 얼마 전 영화 마션에도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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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튼 이시기에 칼텍에서 수학과 항공공학 박사학위까지 따낸 천쉐썬은 미해군에서 중령대우까지 받으면서 2차대전동안 미국의 미사일 개발에 기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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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텍 로켓동아리에서 활동하던 첸쉐썬)

(후에 잠시 MIT에서 교수직을 제안받고 활동하다 칼텍으로 옮긴 교수재직당시의 첸쉐썬)

첸쉐썬은 이렇게 승승장구하며 잘나가는 듯 싶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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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의 공산당과 장제스의 국민당과의 싸움에서 공산당이 승리하고 중국 본토 전역이 공산화되자 미국은 곧바로 중국을 적국으로 규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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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화가 순식간에 중국을 휩쓸고 엄청난 지지하에 마오쩌둥이 실세에 오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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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개새끼해봐를 시전중인 조셉 맥카씨)

당시 커가던 중국과 소련에 의해 위협을 느끼던 미국의 공산주의자 색출운동이었던 맥카시즘은 미국지도부 입맛에 맛는 더할나위 없는 선택이었다.

곧이어 대대적인 공산주의자 색출이 시작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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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이면 무조건 쏘고보았던 맥카시스트)

1950년부터 시작된 공산주의자 색출 운동인 맥카시즘에 의해 공산주의에 대한 위기를 심각하게 느낀 미국 지도부는 간첩혐의로 첸쉐썬을 체포하기에 이른다.

아직까지 그 혐의가 명확히 입증되지 않았지만 당시의 분위기상 미국 군사기밀에 능통한 첸쉐썬이 단지 중국계란 이유로 희생양이 되었단 설이 크다고 한다.

그는 출국금지 조치를 받고 불법체류자 낙인까지 찍히게 되고 가택연금에 또한 처해지게 된다.

그를 공산주의자로 볼 확실한 증거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된 첸쉐썬은

그의 집안 곳곳에 도청기가 설치되는 등 여러모로 차별에 시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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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6.25가 터지게 되고 중국은 많은 미군포로들과 미국에서 조사를 받고 있던 중국계 과학자들과 맞바꾸잔 제안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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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환 리스트중엔 첸쉐썬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미해군에서는 자신들의 로켓과 미사일 개발에 큰 기여중이던 과학자를 적인 공산당에 무상으로 넘기는것에

당연히 반대를 표한다.

당시 국방부 해군청 차장이었던 킴볼은 이렇게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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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was the stupidest thing this country ever did. He was no more than a Communist than I was, and we forced him to go”

(“미국 역사상 가장 병신같은 행동이다. 그는 나보다도 더한 반공인물인데 우리가 우리의 손으로 그를 쫓아냈다.”)

한편 미국으로부터 불합리한 대우와 차별을 무려 5년동안 겪어온 빡칠대로 빡친 첸쉐썬은

이미 미국에 대한 정을 떼고 비행기 탑승 전 만난 기자에게 한마디 말을 남긴다.

“나는 이제 두번 다시 미국에 돌아올 계획이 없습니다.” 

중국에 돌아온 첸쉐썬은 당시 중공의 실세였던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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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과 식사중인 첸쉐썬)

중국에 돌아온 첸쉐썬에게 마오쩌둥은 중국도 인공위성을 발사할 수 있겠냐는 질문을 하는데 이에 그는 15년간의 전폭적 지지를 부탁하고

마오쩌둥은 단번에 오케이 싸인을 날린다.

그리고 곧바로 첸쉐썬은 중국의 모든 로켓관련 프로젝트에 임명되어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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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쉐썬의 주도하에 중국의 공돌이들은 로켓 및 미사일 개발에 갈려들어가게 되고 이들은 곧 중국의 미사일 시리즈인 둥펑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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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R-2로켓을 개발하여 만든 첫 둥펑시리즈인 DF-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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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지 않아 개발된 두번째 둥펑시리즈

이후 둥펑은 급속도의 개량을 거쳐 다수의 미사일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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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국이 다수 운용중인 DF-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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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F-21. 이 중 D형은 미국의 항모전단을 겨누기 위해 개발된 대함탄도미사일이다. 미국도 이미 이 대함탄도미사일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대응책을 마련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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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F-41. 사거리가 약 12000 ~ 15000km 그리고 마하 25로 알려져 있는 고체연료 추진식 도로 이동식 대륙간탄도미사일.

첸쉐썬은 중국의 자체 미사일개발에만 엮이지 않고 소련의 스틱스 미사일을 개량한 실크웜 미사일도 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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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실크웜미사일은 소련의 스틱스와는 다르게 폭격기나 전폭기에도 장착이 가능하며 사정거리는 최대 500km라고 알려져 있다.

실크웜 미사일은 후에 레이저-적외선 유도로 개량되어 중동에 많은 수가 수출되는데 여러 분쟁에서 아랍국가가 이를 써먹는게 서방에 알려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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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북한도 중국의 영향으로 이 실크웜 미사일체계를 운용중이기도 함. 그 성능에 대해 말이 많지만 대함미사일 근접방어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우리나라 해군에겐 만만히 볼 대상은 아닌게 확실하다.

국가의 전폭적 지지를 등에 엎은 첸쉐썬은 미사일 개발을 넘어서 로켓개발에도 큰 이바지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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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바탕으로 1970년 중국은 중국의 발사체인 창정로켓으로 동방홍 인공위성 발사에까지 성공하게 된다.

중국 최초의 인공위성인 동방홍을 싵은 창정로켓은 첸쉐썬이 개발한 둥펑-3미사일의 개량형으로 이로 인해 중국은 소련 미국 프랑스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다섯번째로 자국기술로 우주에 진출한 나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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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당시 발사대기중인 동방홍 위성을 싵은 창정로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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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국가항천국의 창정로켓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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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성공적인 인공위성 런칭을 기념하는 우표)

그는 미사일과 로켓개발에 멈추지 않았다. 중국의 핵개발 총괄책임자 자리에도 올랐는데 그는 정식으로 핵물리학을 배운 적이 없지만

미국에서 수학당시 여러 과학기술 발전 프로젝트를 몸소 체험했던 그였기에 중국은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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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고 얼마지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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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소폭탄 개발에까지 무사히 이른다.

이렇듯 여러 업적을 세운 첸쉐썬은 중국 인민해방군내에서 부사령관급의 대우를 받았다. 당시 문화대혁명으로 과학자 및 지식인들을 대거 차별하던

무식한 공산정권내에서 그에 대한 처우는 메우 파격적이었던 것이다.

이 글에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았지만 그는 공산당의 민주주의 탄압을 묵인하고 문화대혁명과 천안문 사태를 지지하는 등 여러 병신짓을 터뜨리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중국에서 그의 입지는 대단한데 그는 희대의 천재과학자였을 뿐 아니라 중국의 과학기술개발에 어마어마한 공을 끼쳤기 때문이다.

중국의 로켓-미사일-핵무기 개발의 역사에서 그를 빼놓을 수는 없기 때문에 그는 종종 미국의 로켓 개발의 아버지인 폰 브라운과도 동등하게 비교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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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로켓역사에서 중대한 역할을 한 폰 브라운과 일대일 비교될 정도이니 그가 없었다면 아마 중국도 지금만큼의 로켓 기술을 보유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가 말년에 병상에서 지낼 때 후진타오 국가 주석이 방문하기도 했을 정도로 중국이 가진 그에대한 존경심은 대단한걸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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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중국은 2009년 그가 사망하자 그를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하기도 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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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은 그의 생일인 12월 11일에 로고를 그의 모습으로 변경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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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이자면 첸쉐썬이 아니었다면 중국은 현재 미항모전단을 위협하는 대함탄도미사일도, 대륙간탄도미사일도, 인공위성기술도 가지지 못했지 않았을까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역사에 if는 없지만 그가 중국의 로켓기술에 끼친 영향을 생각해볼 때 가능성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중국이 지금만치의 군사기술을 보유하지 못했다면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사드배치도 그렇고 우리가 좀 더 중국의 입김으로 부터 자유롭지 않았을까 한다. 이러한 인재를 한 순간의 선택으로 놓쳐버린 당시 미국이 다소 아쉽게 느껴진다.

3줄요약

1. MIT에서 석사 칼텍에서 박사를 취득한 첸쉐썬은 NASA의 연구소에 들어갈정도로 한때 미국의 촉망받던 인재였음

2. 1950년 맥카씨즘을 직빵으로 맞은 그는 몇년 후 결국 중국으로 운지

3. 중국에선 그를 모든 국가주도 과학 프로젝트에 투입하여 엄청난 성과를 쌓아올림. 현재 중국 로켓기술의 아버지라 불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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